[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순천 선암사로 들어가는 조계산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옛날에 쌓은 무지개돌다리가 있다. 이 돌다리는 반원형으로 마치 성문의 앞처럼 보이지만, 돌로된 반원형의 다리를 계곡의 사이에 놓은 것은 절로 들어가는 계곡이 이세상과 천상 사이를 갈라놓은 것으로 공간의 비유적 표현이다. 불교에서 절은 부처님을 모신곳으로, 부처님이 있는 곳은 불국토로영원한 즐거음이 있는 곳이며,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중생계로 온갖 고통과 생사 윤회가 끝없이 계속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절을 찾는다는 것은, 불상이 있는 산속의 전각을구경삼아 가는 것이 아니라, 온갖 세파속에서 시달리는이세상에서 영원한 안식의 부처님 세계로 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 경전상설명의 의미에서중생계와 불국토는 너무도 멀고도 가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런 불교의 이상세계인 부처님이 모셔진 불국토로 나아가는 길에는 상징적으로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다리가 있으니, 그 다리가 바로 이세상에서하늘로 걸쳐놓인 무지개다리다. 그런 의미로 옛부터 절로 가는 계곳에는 많은 다리들이 놓였고, 그 다리는 무지개형상으로 놓았다. 비록 그리 크지도 않은 계곡사이에 놓인 다리이지만, 이 다리는 이승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운람산 수도암은 완도의 옆에 있는 고흥반도의 끝자락의 산 중턱에 있는 작은 암자이다. 운람산의 옛이름은 모악산이었다고 하여, 지금도모악산 수도암이라고도 한다. 작은 절 수도암은 그 창건연대가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까지 올라간다고 하며, 그 창건주는 신라 흥덕왕때영헌스님 또는 고려 순종 때인 1083년 도회스님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 연원은 멀고 멀지만, 옛 자취는 별로 없어서 정확한 창건연대를 알 수 없다. 수도암은 조선 후기 미륵신앙의 도량이며 기도하는 절로,절안에 전각들은 작지만, 그 안에는 대웅전, 지장전, 무루전, 삼성각 등이 있어 갖추어야할 전각은 모두 갖추었으며, 그 가운데무루전은 부처님의 제자들을 모신 나한전이나 그 이름은생소하다. 봄이 깨어나는 운람산 수도암은 작지만 매우 아늑한 절로, 절의 입구에 새로지은 재래식 해우소는 자연생태순환의 고리를 잇고자 하는 깊은 뜻이 있어보여 불교의 순환과 윤회를 생각나게 한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미륵사는 백제시대 후기에 세워진 거대한 절이었다. 미륵사는 600년대 초기 백제의 무왕이 백제를 미륵불국토로 만들기 위해 지상에 세운한민족 역사상 가장 큰 절이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무왕은 왕비와 함께 사자사(獅子寺)로 행차하는데, 이때 용화산(지금 미륵산) 아래 연못가에 미륵삼존불이 나타나 가던 수레를 멈추고 부처님께 예를 표하였다. 그러자 왕비가 이곳에 절을 세우기를 청하여 무왕은 당시 왕사였던 지명법사(知命法師)의 도력 도움으로 하룻밤 사이에연못을 메우고 그 터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미륵사는 불교신앙 중 미래에 다시 올 부처님을 바로 이곳 백제땅 미륵사에 올 것을 염원하며 세운 것으로,백제가 바로 미륵불국토여야 한다는 필연성을 표현한 것이다. 미륵신앙에 의하면, 미륵은 석가모니 당시 그의 제자였으나, 부처님 보다 일찍 타계하였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가 이 세상에서 죽은 후 지금은 천상세계인 도솔천에 태어난다고 하였다. 그래서현재는 미륵보살로 도솔천의 내원궁에서 하늘세계의 중생들을 교화하고 있다고 하며, 도솔천에서의 생이 다 되는 날에는 다시지상에 미륵부처님으로 온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전남 구례는 지리산의 남쪽에 있다. 지리산에는 많은 옛절들이 있으며, 그 중 가장 큰 절은 화엄사다. 그 화엄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또 하나의 옛절로 연곡사가 있다. 연곡사는 신라시대 인도에서 온 연기조사가 이땅에 불국토를 이룩하고자 창건한 절로 화엄사와 함께 연곡사가 있다. 연곡사는 신라말부터 고려초까지 선사들의 수행처로 이름 높은 고승들이 많이 있어, 그 자취가 지금도 남아있다. 지금 남은 자취는 연곡사의 본전인 대적광전 뒷편 오솔길에 있는 3기의 승탑이남아이를 증거하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스님의 행적을 기록한탑비의 몸돌을 누군가 파괴하여 없애버려, 지금은 고승의 행적을 알 수가 없으며 사리를 모신 승탑과 승탑비의 이수와 귀부만이 남아있다. 천만 다행스럽게 승탑과 이수 귀부는 손상되지 않고 거의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연곡사는 선가의 수도도량으로 이름이 높아 전각들이많이 있었고임진왜란 때까지는 온전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으로 전국의 절과 궁궐들이 불에 탈때 이곳 연곡사도 일본군의 방화로불타버렸다. 그런 연곡사는 1600년도 중반 임진왜란 뒤에태능스님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봄이 되니 만물이 다시 태어난다. 겨울철 앙상한 가지만 남긴채 죽은 듯 하던 매화나무에 봄의 기운이 감돌자 땅속에 물을 빨아올려 움을 틔우더니 드디어 감추었던 붉은 꽃을 피워낸 것이다. 이런 자연의 순환은 계절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것이다.생명 있는 것의 죽음이란계절의 순환처럼봄에 피어나서여름에는 번성하고, 가을이면 단풍들고 겨울이면 죽어가는 이치와 같다. 죽은 것 같지만 그러나 다시 봄이 오면 소생하듯 만물은 겨울이라는 죽음이 영원한 것이 아니고, 다시 봄이 되면 피어나듯 끝없이 윤회하는 것일 뿐이다. 식물의 세계가 사계절에 따라서 윤회하는 것이라면, 동물의 세계에서는 다른 방법으로 돌고 또 돈다고 생각해서 육도윤회가 된다고 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생에서 덕을 쌓고 살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좋은 집안에 태어나며, 이 세상에서 악행을 하고 살면 내생에는 지옥에 떨어져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한다는 윤회론이 생겨난 것이라 생각된다. 죽은 듯 앙상한 가지에 새봄을 맞이하여 피어난 화엄사 홍매화는 만물의 소생함을 알려주고, 전국의 많은 사진가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꽃이 피어있는 날은 며칠 안되기에 그 아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태안반도에 자리한 신두리 해안은 한국에서 모래언덕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사막이 없는 한국에서 언듯 사막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자연유산으로 천연기념물 제431호로 지정된문화재다. 신두리 해안사구는 빙하기 이후 1만 5천년 전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태안반도의 북서쪽에 위치하여 해안가의 모래를 바람이 쓸어올려 모래언덕이 된 것이다, 그러나 해안가의 개발로 건축물이들어서고, 해안가에는 제방이 들어서면서바람의 방향이 바뀌고,세기가 약해져 더이상 모래를 쓸어올리지 못하고, 그나마 남아있던 모래언덕에는 갈대들이 뿌리를 내려 풀밭이 되고, 세월이 더 가니 갈대가 머금은 물에 소나무도 자라나 신두리 안쪽은 이미 소나무 밭이 되었다. 이렇게 세월이 더 흐르면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해안모래언덕인 신두리도 곧 없어질지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신두리 바닷가에는 물빠진 모래밭에 조개와 개불 등이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용흥사는 전남 담양군 용귀산(龍龜山)에 위치한 고찰이다. 창건은 백제시대에 되었다고 하나 역사를 알 수있는 자료가 없어서 매우 아쉬웠다. 본래는 용귀산에 위치하여 용귀사라고 하였으나 뒤에다시 절을 세우면서 용흥사라 이름을 바꾸었다. 그 때는 조선 숙종대 이후다. 그런 이유로용흥사에는 아주 오래된 사찰의 전각은 없었으나, 일주문을 들어서면 스님들의 사리탑인7기의 승탑이 있다. 이 승탑들은 대부분 조선조에 세워진 승탑으로, 이곳에서 수행하며 살다간 스님들 중 고승들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유물이다. 용흥사는 용귀산 서쪽 경사면에있어 절의 배치는 전체적으로 서향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절의 본전인 대웅전까지 가려면 일주문 부터경사진 비탈을 오르다 계단을 거쳐야 사찰의 외곽을 지키는 사천왕문을 만나게 된다. 사천왕은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세계를 지키는 외곽 호위장군으로 부처님의 세계에 접근하는 온갖 잡귀를 지킨다는 뜻으로 세운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각 방위별로 담당하는 장군들의 이름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다. 사천왕문을 들어서서 바라보면 계단 위로 높직하게 루문이 있는데 그 루문은 보제루로 본전인 대웅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조선왕릉중 태릉은 서울 노원구 태능 선수촌으로 잘 알려진 곳의 중심부에 있다. 태릉은 조선의 11대 왕이었던 중종의 제2계비로 13대 명종의 어머니로, 12대 인종이 일찍 죽은 뒤 12세 어린 명종을 왕으로 앉히고 뒤에서 수렴청정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문정왕후(1501~1565) 윤씨의 릉이다. 문정왕후 윤씨는 중종의 세번째 부인으로 연산군을 내쫒고 등극한 중종이 살아있을 때는 제1계비 장경왕후가 낳은 인종을 친 아들처럼 잘 보살피다, 그가 일찍 죽자 자신이 늦게 낳은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 권력의 야욕에 불탔다. 문정왕후는 조선시대 남성중심인 유교 성리학 시대에 내노라는남성관료들을 호령하며 임금의 뒤에서 왕권을 휘두르고, 대신들의 빗발치는 반대 상소를 무릅쓰고 억눌렸던 불교를 한때 나마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도첩제의 실시로 폐지되었던 승과제도를 부활하여 당대 가장 유명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를 장원급제로 발굴하였고, 당대 불교계를 이끌던 허웅당 보우대사를 강남 봉은사 주지로 임명하고 궁궐로불러들여 국사를 의논하였으며, 그로 하여금 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잠들어 있고,태조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대나무고장으로 옛부터 이름 난 고을은 담양이다. 담양은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굵고 큰 대나무가 많이 자라나, 대나무로 다양한 생활용품들을 만들어서 전국에 팔아왔다. 대나무는 속이 텅비어있지만 곧게 자라서 가벼우면서도 단단한 특징이 있어서 이를 길고얇게 살을 만들어 대나무 그릇, 우산, 부채 등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었다. 플라스틱 용품이 나오기 전에는 대나무야말로 정말로 좋은 재료였지만, 이제는 플라스틱에 그 지위를 넘겨주고 대나무고장으로서의옛 명성은 대나무골관광산업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죽녹원은 대나무로 생업을 삼았던 담양에 울창한 대나무를 주제로 공원을 만들어 대나무의 멋을 느낄 수 있도록 오솔길과 정자를 조성하였다. 5월이면 죽녹원의 왕대들에 굵은 죽순이 솟아나는 모습이 장관이다. 이때 대나무 축제도 열린다.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찾을 때는 아니지만 대나무의 곧은 기운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봄을 재촉하며 찾아보았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기며 속은 어이 비었느냐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 하노라 윤선도 오우가 중에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남 당진의 서쪽으로 가면 서해바다가 있다. 이곳은 고대 중국으로 가는 뱃길로,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여기서 서쪽으로 배를 타고 가면 중국의 산동반도와 가장 가까와 이곳을 차지하는 것은 중국과 교역에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기에 고대 삼국시대에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특히 삼국시대 고구려가 한반도와 만주를 차지하고 있을 때, 백제는이곳을 차지하고 있어서 가장 번창하였다. 반대로 이곳을 잃어버린 뒤 백제는 그 힘이 약해졌다. 그런 지리적 위치였기에 백제는 이곳을 뺏기지 않으려 애썼고, 신라는 반대로 이곳을 뺏으려 하였기에 두나라 사이에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런 가운데, 삼국통일 무렵에는 이곳을 신라가 점령하였고, 당시 신라의 구법승들도 여기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들어가서 불교학을 공부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스님이 바로 의상대사였다. 의상과 원효는 이곳 근처 어디에선가 배를 기다리다 노숙하게 되었는데, 원효는 한 밤에헛간 같은 곳에서 잠을 자다가 목이 말라 바로 옆에있던,바가지에 고여있던 물을 마시고 편히 잠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다시 보니 그 바가지에 고였던물이 해골물 임에 깜짝 놀랐고, 사물의